[석율그래/율래] Healing
W. by 적운
"장그래, 가서 이거 전부 싹 갈아버리고 와."
"알겠습니다."
한참이고 이 서류 저 서류 할 것 없이 팔락팔락 넘겨보던 오 차장이 이것저것 추려서 넘겨주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면서, 그래는 제가 받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대충 파라락 훑어보며 이 정도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구나, 하는 뻘한 생각과 함께 오 차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파티션 바깥으로 나와 휴게실 바로 옆의 탕비실로 향했다.
이걸 다 갈아놓고, 돌아가서 입력하던 거 마저 입력하고…
탕비실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제가 할 일을 비어있는 손으로 꼽아가며 차근차근 정리하던 그래는, 이내 몰려오는 피로감에 새어나오는 하품을 잇새로 씹어삼키면서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요 얼마 전에 큰 계약을 하나 하느라 잔뜩 불어난 서류와 밀려드는 전화와 업무에 파묻혀 죽을 것 같던 때에 비하면 요즘은 그래도 아주 조금 살만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는 업무의 양이 줄어든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야근 안 하는게 어디야, 그래도…"
그런 말을 혼자 늘어놓으며 어느샌가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세절기에다 제가 들고 온 종이를 한 장씩 집어넣던 그래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손과는 다르게 머리로는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요 근래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를 머릿속에 잠시 떠올렸다가 곧 머리를 흔들어 그 얼굴을 지워버렸다.
…그러고보니 요즘 바쁜 거 같던데.
평소 같았으면 심심찮게 15층에 내려와서 저희 팀인 양 영업 3팀에서 할 일 없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던가 혹은 제가 바쁠 때엔 자원팀의 안영이나 철강팀의 장백기 등 누구 하나라도 붙잡아서 두서 없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고 사라졌을법한 석율이었지만, 요즘은 정말로 바쁜 모양인지 좀처럼 내려오는 일 없이 출근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얌전히 제 자리에서 일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그와 가끔 휴게실에서 마주칠 때면 평소의 그 밝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얼굴을 하고서 내 말 좀 들어봐요, 하며 성 대리-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상사-의 욕을 쏟아내곤 하는 그였고, 처음에는 제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상사의 뒷담화를 하는 그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충 맞장구를 치며 어물쩡 넘어가곤 했지만, 좀처럼 사람을 미워하는 법도 없고 누군가에게 미움도 받지 않는 석율의 투정 섞인 푸념이 점점 늘어날 수록 그래는 그저 이렇다 할 조언도 해주지 못한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못났다고 생각했다.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주워섬기며 얼마 남지 않은 종이를 탁탁 털어 정리하던 찰나, 상념에 빠져있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인기척에 저도 모르게 휴게실 쪽을 돌아보던 그래는 곧 제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휴게실의 내부를 고개만 쏙 내밀어 얼른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휴게실 한 쪽 구석에 무기력하게 앉아서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있는 익숙한 모습에 먼저 아는 척을 할까 하다가도 상사의 뒷담화를 하면서도 저에게는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하던 그의 축 처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서, 남은 서류를 얼른 세절기에 밀어넣은 그래는 곁눈질로 휴게실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이내 영업 3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파티션 안쪽의 제 자리에 앉아서 책상 위에 늘어놓은 자료들과 모니터를 눈이 빠지도록 바라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가도, 빠르게 이어지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서서히 느려지다가 곧 잦아들 때 쯤 그래는 가볍게 마른 세수를 하고서 제가 앉은 의자를 조금 뒤로 돌렸다.
"차장님, 커피…"
"어? 어, 난 됐고…천 과장은 지금 없고…김 대리는?"
"아뇨, 저도 지금 생각 없는데."
"어…저 그럼 잠시 휴게실 좀…"
"그래-"
"네?"
"아니, 갔다오라고."
"아, 네."
서류에서 눈도 돌리지 않는 오 차장의 말에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파티션을 빠져나온 그래는, 괜히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기듯이 조금 전 제가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탕비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금 휴게실 내부를 살피듯 고개만 쏙 내밀어 안을 둘러본 그래는, 여전히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석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정수기 옆에 놓인 종이컵을 두 개 꺼내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누가 들어올까 입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주머니를 뒤져 방금 챙겨온 볼펜을 꺼내 든 그는 한 쪽 종이컵에다가 무어라 조그맣게 끄적이더니 곧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노란 커피 믹스를 컵 안으로 쏟아넣었다.
"한석율 씨, 여기서 뭐 합니까."
"…장그래 씨."
어…나 지금 도저히 일 할 기분이 아니라서.
일부러 들으라고 부른 목소리에 반응할 기력은 있는지 고개를 돌려 활짝 웃는 얼굴로 아는 척을 하면서도, 이내 지친 얼굴을 하고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석율을 여전히 선 채로 내려다보던 그래는 곧 그의 얼굴 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뭐야, 이거?"
"보면 모릅니까, 커피요."
"헐, 대박사건. 지금 장그래가 나 마시라고 직접 커피를 타준거야?"
"아뇨, 차장님이랑 대리님 드시라고 탔는데 안 드신다고 하셔서."
"에이, 뭐야 그게. 내가 처리반이야?"
그래도 어쨌든 애인이 타 준 커피네.
이어지는 그래의 말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면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리다가도 곧 제가 입 밖으로 꺼낸 말에 아차- 하는 얼굴로 제게 커피를 건네주는 그래를 올려다보던 석율은, 평소라면 회사 안에서는 사귀는 걸 비밀로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저를 타박했을 그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내밀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얌전히 그래의 손에 들린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 종이컵을 쥐고 있느라 조금 뜨거워진 손가락 끝이 가볍게 얽혔지만, 이내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얼른 손을 원래대로 되돌린 그래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제 몫의 커피를 조금 마셨다.
"적당히 쉬고 일 하러 가요."
"…알았어."
그리고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업무로 복귀하는 그래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쫓던 석율은, 아직도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제 손에 쥔 종이컵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종이컵에 인쇄되어 있는 커피 회사의 로고와 그 아래에 빨간색 볼펜으로 조그맣게 적혀있는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석율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내어 웃으면서 테이블 위에 방치해놓았던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통화음이 몇 번 이어지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한껏 눈을 접어 웃으면서, 석율은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장그래,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일이나 하러 가십쇼.]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끊어지는 전화에도 아무런 불평도 늘어놓지 않은 채 얌전히 통화를 끝낸 석율은, 손에 든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서 습관처럼 종이컵을 구겨 버리려다 말고 여전히 손에 들고있는 휴대폰으로 종이컵에 적힌 메세지-최대한 조그만 글씨로 「술 한 잔 할래요?」 라고 적힌-를 찍고 난 뒤에야 한 손으로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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