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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산] 전야(前夜)

W. 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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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으로 물든 하늘 위엔 점점이 박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별들을 다 세기라도 할 것처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산지는 물고 있던 단죽을 내려놓았다. 입술 사이로 번져 나온 희부연 연기가 어두운 밤하늘로 섞여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어깨에 두른 두루마기 자락을 조금 끌어올렸다. 봄이 오기는 하는 모양인지 해가 뜬 낮에는 제법 따스했지만, 어둠이 내린 밤의 공기는 아직 조금 쌀쌀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력으로는 아직 1월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한참 바깥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넓지는 않은, 혼자 지내기에는 적당한 저택이긴 했으나 어둠과 적막에 둘러싸인 지금은 그저 황량하다 못해 스산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인기척은커녕 들개나 길고양이들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았다.

 

 

 

 

그대로 얼마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는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탓에 잠시 흘러내린 흑색의 두루마기를 다시금 추스르고는 등롱을 챙겨 바깥으로 나섰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밤공기가 목덜미에 감겼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집 안팎을 확인하듯 한 바퀴 둘러보던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멀리서 울리는 인경[각주:1]과 함께 관군들이 순찰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마당에 우두커니 선 채로 듣던 그는 다시 방으로 되돌아왔다.

 

 

 

 

이렇다 할 소득도 없이 방으로 돌아온 그는 등롱을 내려놓고서 두툼한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약간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단죽에 남은 재를 털어내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기다리던 이가 조정의 녹을 받는 무관이기도 했고, 당장 날이 밝으면 이국으로 향하는 사절단과 함께 이 곳을 떠나게 되는 만큼 이래저래 준비하느라 바쁠 터였다. 사절단에 같이 간다는 얘기도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이 아니긴 했지만, 지재상인 자신이 그 정도 소식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인경이 울렸으니 이제는 거리를 다닐 수도 없어졌다. 그러니 기다리는 이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혼자만 안달이 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작게 혀를 찬 그는 두루마기를 잘 걸어두고서 금침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행히 아까 불을 지펴놨던 덕분에 금침 속에는 훈기가 가득했다. 그새 차가워진 몸이 따뜻한 이불 속에서 녹아내리듯 풀렸다. 따뜻한 금침 속에서 졸음에 겨운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찰나, 밖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척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 나가서 확인했을 때만 해도 인기척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을 만큼 조용했다. 그런 와중에 느껴지는 인기척이라면 딱히 좋은 의도로 자신을 찾아온 건 아닐 터였다.

 

 

 

 

손으로 눈가를 가린 그는 작게 탄식하며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집중했다. 보통 어둠을 타 급습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발소리를 죽이게 마련이건만, 딱히 그러지도 않는 것을 보아하니 살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느껴지는 기척이 너무나 익숙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 중 이런 식으로 찾아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몰려오는 짜증에 작게 미간을 찡그린 그는 금침에서 몸을 일으키며 문밖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깥에 서 있던 그림자가 문을 열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산지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녹색의 도포를 걸친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갓끈을 풀어내 익숙한 손길로 벽에 걸었다.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산지는 일부러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인경도 울렸는데, 무관 나리께서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그러니까 왔잖아.”

무슨 소리야, 파루[각주:2]까지 여기 있으려고?”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볼멘소리를 듣고 있던 사내-조로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도 이내 입매만 끌어올려 씩 웃었다.

 

 

 

 

명색이 정보를 사고파는 사람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무슨 소리야?”

아니다, 됐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화를 끝낸 조로는 마치 제집인 양 알아서 방석을 척척 꺼내오더니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산지는 작은 한숨과 함께 단죽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로 연초를 채워 넣고 불을 댕기던 찰나, 이번엔 조로에게서 못마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손님이 왔는데 대접이 뭐 이래?”

네가 무슨 손님이야, 불청객이지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밖에 없거든?”

 

 

 

 

목소리에 가득한 불만에 비해 꽤 즐거워하는 듯한 그의 기색에 산지는 말을 멈춘 채 단죽을 입에 물었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말없이 연초만 태워대던 그는 재를 털어내며 작게 덧붙였다.

 

 

 

 

언제 오는데.”

 

 

 

 

밑도 끝도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대답하기 전에 뭔가를 가늠해보듯 손가락을 꼽아보던 조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엄지로 턱을 쓰다듬었다.

 

 

 

 

장담은 못 하겠는데못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릴걸.”

한 달

 

 

 

 

가만히 대답을 곱씹어보던 그는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좁은 방 안에서 희부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로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대륙을 건너가는 거니까어쩔 수 없지.”

아니, 궁엔 사람이 너밖에 없냐, 왜 매번 너만

믿고 맡길만한 놈이 나 밖에 없나 보지.”

…….”

 

 

 

 

단죽 끄트머리를 입에 문 채로 산지는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꼬박꼬박 받아치는 것도 짜증이 났지만, 그 대답들이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게 더 짜증 났다. 그의 태연한 태도에 다시금 입술을 비죽이던 산지는 뭔가 생각난 듯 입매를 말아 올려 웃었다.

 

 

 

 

, 거기 가서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무슨 헛소리야.”

거기서 길 잃어버리면 답도 없어, 알지?”

 

 

 

 

이어지는 산지의 말을 듣고 있던 조로는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 안 왔으면 좋겠냐?”

.”

진짜로?”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조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산지는 작게 입술을 감쳐 물었다. 나름대로 웃자고 한 말에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니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여태까지 혼자서 그가 언제나 올까 하고 기다렸던 것도, 그의 언사에 멋대로 휘둘리는 것도 왠지 억울한 마음에 던진 농담이었다. 오래 만나기도 했거니와 이런 적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늘 그렇듯 못 들은 척 넘기거나 농담으로 받아치거나 할 줄 알았다. 그런 제 예상을 뒤엎기라도 하듯 등롱의 불빛 탓에 묘하게 그늘이 진 얼굴이 어쩐지 서운해하는 것만 같아서, 불이 사윈 단죽을 내려놓은 산지는 작게 덧붙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몸이 직접 찾으러 가 줄게.”

…….”

내가 그 동안 만든 인맥이 몇인데 길 잃은 사람 하나 못 찾겠냐, 내가.”

…….”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조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딱히 더 기분이 상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속으로만 안도하던 찰나, 탁상을 한쪽으로 밀어치우는 조로의 손짓을 눈으로 좇던 산지는 이어진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이리 와.”

 

 

 

 

강압적인 말투와는 달리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쩐지 귀 끝이 붉어질 것 같은 기분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산지는 그와 거리를 조금 좁혀 앉았다. 그 순간 그의 팔을 당겨 그를 품에 끌어안은 조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늦게 와서 짜증이 났으면 그렇다고 하면 될 걸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냐.”

…….”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산지는 그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기댔다.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그는 이번에도 일부러 빈정거리는 이유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봐두고 싶었다는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뭐가 됐든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이 꽤 지난 만큼 그저 얼굴을 보고 싶었다는 게 솔직한 속내였다. 다만 저 혼자만 그리워하고 애태웠던 것이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에 그랬던 거였지만, 그의 말대로 그건 일종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달래듯 팔을 둘러 몸을 꽉 끌어안은 조로는 천천히 그의 등허리를 도닥였다.

 

 

 

 

이번엔 정말 시간이 없었어, 급하게 정해져서 시간도 빠듯했고

…….”

내가 지금 여기 오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긴 아냐.”

…….”

 

 

 

 

그 말에 산지는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새 살이 내려서 얼굴이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홀린 듯 그의 얼굴로 손을 뻗어 뺨을 매만지자,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은 조로는 그의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추고서 얼굴을 파묻었다. 별 것 아닌 작은 입맞춤이었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입술이 닿은 손바닥부터 간질간질한 기분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북소리가 울렸다. 아까 인경이 울었으니 어느덧 삼경[각주:3]이 된 모양이었다. 멀리서 둥둥 울려오는 북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조로는 고개를 조금 내려 품에 안긴 산지와 눈을 마주했다.

 

 

 

 

산지.”

?”

생일 축하한다.”

…….”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조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산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새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붉어진 그를 보며 입매를 끌어올려 웃은 조로는 그의 이마에다 작게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을 받으며 산지는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알고 있었어?”

그러면, 넌 내가 여기 왜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냥내일 날 밝으면 떠나야 하니까 인사하러

 

 

 

 

우물우물 이어진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조로는 손을 움직여 그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놓아주었다.

 

 

 

 

너 그따위 눈치로 진짜 어떻게 정보 팔아서 먹고 사냐.”

뭐 임마?”

이번 생일에는 같이 못 있으니까 얼굴 보러 온 거잖아, 멍청아.”

…….”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여전히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조로는 그를 끌어안은 팔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힘들게 순찰 피해 가면서 여기까지 왔더니 애인이란 놈은 눈치도 못 채고

…….”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진짜 모르겠냐?”

?”

 

 

 

 

잠시 눈을 굴려 가며 고민했지만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에 조로는 그가 눈치채기를 포기하는 대신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밖은 통행 금지고, 파루까지는 아직 이경이 더 남았고

…….”

 

 

 

 

다만 설명하는 목소리에 배어나는 웃음기까지는 어쩔 수가 없어서, 입매를 끌어올려 씩 웃은 조로는 다시금 그와 눈을 맞췄다.

 

 

 

 

그때까지 나는 여기 계속 있겠지?”

그럼 너도 그냥 나 보러 왔다고 하면 되지 꼭 그렇게 돌려 말해야겠냐.”

 

 

 

 

설명을 듣는 내내 비죽거리고 있던 그의 입술 사이로 토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달래듯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지만, 여전히 튀어나온 입술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쁜 새끼. 처음부터 바로 그렇게 얘기했으면 괜한 시간 낭비 안 하잖아.”

이 정도는 네가 눈치챌 줄 알았

됐으니까, 조용히 좀 해 봐.”

 

 

 

 

그의 위로 올라앉듯이 자세를 조금 고쳐앉은 산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 순간 자연스레 허리에 둘러지는 팔에 만족스런 미소를 띠면서, 산지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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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일 저녁 2경(二更)에 종각의 종을 28번 쳐서 야간의 통행을 금지하는 일. [본문으로]
  2. 매일 새벽 5경 3점(五更三點)에 큰 쇠북을 쳐서 도성의 통금(通禁)을 해제하던 일. 또는 그 시각. [본문으로]
  3.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의 시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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