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참을 책과 씨름하던 상디는 글자가 날아가는 노트 위로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자필 레포트를 원하는 교수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고 있으려니 사람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을 다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제 학점을 위해서라도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교수에 대한 저주를 읊으며 흰 종이 위로 휘갈겨 쓴 글씨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상디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꽤 오래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새 굳은 근육이 시원하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분명히 해가 질 무렵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왔던 도서관 바깥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제야 뒤늦게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입모양만으로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팔자에도 없는 자필 레포트 덕분에 제 일정이 꼬여버린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제게 있어 꽤 중요한 이벤트마저 잊을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망했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는 빠르게 책상위에 늘어놓았던 것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벗어나 교정을 가로지르며 상디는 익숙해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자고 있을까 싶었던 제 걱정이 무색하게도,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어라, 살아있네?”

- 용건 없으면 끊는다.

, 끊지 마, 미친






정말로 전화를 끊어버릴 것만 같은 그의 태도에 허둥지둥 그를 붙잡은 상디는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나 오늘 자고 가면 안 되냐?”

- 그래라.






짧고 간결한 대답과 함께 금방 끊어지는 전화에 상디는 허, 하고 탄식을 흘렸다. 굳이 길게 통화하지 않아도 괜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오라는 살가운 말 한마디 정도는 덧붙여도 괜찮지 않나 하는 부아가 슬그머니 치밀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늦게 연락하게 된 것도 결국 제 탓이라서, 괜히 애꿎은 돌부리만 걷어차며 상디는 얼른 그의 집으로 향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뭔지 그의 집이 학교에서 가까운 편이라, 빠른 걸음으로 그의 집 앞에 도착한 상디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가만히 도어락을 바라보고만 있던 그의 손이 문에 닿기도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을 상디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뭐 여기 CCTV 같은 거 달아놨냐? 나 있는 줄 어떻게 알고

감이지.”

감 같은 소리하네, 미친






이어지는 상디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인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뒤를 따라 문을 닫고 들어온 상디는 제 집인 양 실내용 슬리퍼를 꿰어 신고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예전만 같았으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청소 좀 하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을 터였건만, 제 오랜 교육-혹은 세뇌-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제는 깔끔하게 정리를 잘 하고 있었다.

자주 오는 탓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괜히 몰려오는 뿌듯함에 집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찰나, 제 쪽은 보지도 않고서 이어지는 그의 말에 상디는 저도 모르게 책상 앞에 앉은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침대에 네 옷 꺼내놨으니까 씻고 와, 나 이거 마무리만 하면 돼.”

? 알았어.”






평소 같았으면 네가 무슨 놈의 과제냐고 놀려댔을 테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모든 것이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것을 괜한 기분 탓이라 생각하며 제 집인 양 씻고 나온 상디는,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여전히 책상 앞에 앉은 조로의 너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 만났을 당시만 해도 학교를 코앞에 두고 길을 잃는 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멍청이가 제 연인이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마 그 때 길을 잃었던 것을 도와주었던 게 인연이었을까, 3년을 내리 같은 반을 하더니 대학도 같은 곳으로 와버렸다.

그렇게 제법 긴 시간 동안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를 반복하는 동안 서로의 관계는 같은 반 친구에서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관계의 이름이 바뀌어 있었고, 늘 제 앞에서 조금 앞서 걷던 그가 어느새 저와 나란히 걸음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그 단단한 뒷모습에 남자라면 질색을 했던 제가 반해버렸다는 건 아마 본인에게는 죽어도 말할 일이 없을 비밀이었다.

새삼스럽게 감성에 젖어 있노라니 공연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그것을 숨기듯 뒤집어 쓴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던 그의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이 얹혔다.






저녁은 먹었어?”

먹었으니까 이 손 좀 치워줄래?”

그래나 씻고 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었고, 이내 제 앞에 나타난 조로의 모습-바지는 입었지만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을 바라보던 상디는 손에 들려있던 수건을 냅다 그에게 던져주었다.






빨리 옷 입어, .”

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이에 왜 이래?”

감기 걸리잖아, 너 감기 걸리면 내가 귀찮다고, 이 바보 마리모야!”






애꿎은 감기 핑계를 대며 옷장에서 티셔츠를 찾아 냅다 던져주자,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셔츠에 팔을 꿰어 넣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상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로의 말 대로 이미 볼 것 다 본 사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모든 것들이 어색하고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감추듯 침대 한 쪽을 차지하고 눕자, 자연스럽게 저를 바라보며 모로 돌아누운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내준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상디는 괜히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쿡쿡 찔렀다.






어우, 딱딱해.”

그럴 거면서 왜 달라고 했냐.”

내가 이럴 줄 알면서 왜 줬는데 그럼.”

뭐래, 싫으면 말던가.”






늘 그렇듯 의미 없는 가벼운 말다툼이 이어지는 동안 상디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꽤 흘러서 자정이 조금 지나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상디는 다시금 그의 팔을 쿡쿡 찔렀다.






마리모야.”

.”

오늘 며칠이더라?”

“10일이잖아?”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얼굴을 하는 조로를 바라보며 상디는 작게 혀를 찼다. 제 일이라면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은 그는 이상하게 자신의 일만 되면 평소의 눈치는 온데간데없이 둔감해지곤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낯선 일도 아니어서, 작게 혀를 찬 상디는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자정 넘었어, 바보야.”

그럼 11일이지 뭐.”







그러거나 말거나 늘어진 하품과 함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돌아온 그의 대답에 상디는 작게 미간을 구겼다. 어쩐지 저만 잔뜩 신경을 쓰고 있던 것 같아서 조금 억울하기는 했지만, 자신도 그렇고 조로도 과제로 바빴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제가 억울한 건 억울한 거라서, 일부러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상디는 대놓고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걸 왜 좋아해가지고는

?”

생일 축하한다고, 멍청아.”

.”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조로는 곧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과 함께 상디와 눈을 마주했다.






너 그래서 자고 간다고 했냐?”

, 싫어? 싫으면 집에 가지 뭐.”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뒤에서 저를 붙잡는 손길에 상디는 도로 침대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언제 움직였는지 어느새 자신의 위로 올라탄 그를 바라보던 상디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빗겨 두었다.






나 내일 오전 수업인데.”

뭐래, 내가 뭐 한다고 했냐?”

!!”






위에서 떨어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괜한 부끄러움이 몰려와서,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붉힌 상디는 그의 팔을 괜히 찰싹찰싹 때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낄낄거리고 웃은 조로는 다시 옆자리에 누운 채 그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고맙다,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 됐어, 꺼져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과 여전히 잔뜩 몰려온 부끄러움에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팔에 상디가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자 조로는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주말에 다 하자, 주말에.”

.”

오랜만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

네가 기대한 것도 하고.”






이어지는 말과 함께 짓궂게 엉덩이를 주무르는 그의 팔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자, 맞으면서도 소리 내 웃던 조로는 상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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